"우리는 세인이 즐기듯이 즐기고 만족스러워한다. 우리는 세인이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그것에 관해 읽고 보고 판단한다."
대중에 매몰된 색깔 없는 자아가 아닌 각자의 신념과 개성 있는 인간을 지향했던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인간의 삶을 본디 삶과 비본래적 삶으로 구분한다.
비본래적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이데거는 비본래적인 삶을 사는 현존재를 일상인이라고 부른다.
일상인이 사는 세계를 주위 세계라고 하는 데 우선 비본래적 삶과 본래적 삶을 들여다보려면 하이데거가 제시한 세 가지 세계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
첫째, 주위 세계
주위 세계에서 존재자들은 현존재에 도구와 수단으로써 드러난다. 사람들은 특정 목적을 가지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다.
이때 고려와 둘러봄이라는 개념이 나오는데, 관계 맺는 상대방에 대한 현존재의 마음 쓰임을 고려라 하고, 그러한 만남을 이끄는 방식을 둘러봄이라고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현존재가 만나게 되는 존재자는 모두 도구라고 부른다. 이처럼 주위 세계는 도구에 대한 고려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둘째, 작업 세계
현존재가 일차적으로 삶을 영위하는 공간.
이러한 주위 세계는 작업 세계와 공공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성립한다. 현존재가 작업 세계에서 일차적으로 삶을 영위한다는 점에서 주위 세계의 일차적인 지반은 작업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공공 세계
현존재가 사람들과의 담론을 통해 삶의 목적과 가치를 부여하는 세계로 작업 세계의 작업 목적을 부여하는 세계이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목적에 따라 드러나는 공공 세계가 작업 세계 내에서의 도구(사람들)의 전체 연관의 의미를 규정하며, 그러한 주위 세계를 형성한다.
1. 비본래적 인간 '세인-자기'
일상인은 이렇게 주위 세계에서 비본래적으로 살아가는 현존재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현존재는 자신이 스스로 세운 신념과 목적이 아닌 공공 세계가 부여하는 목적과 가치에 따라 세상을 이해한다.
아직은 이 사람도 저 사람도 그 누구도 아닌 익명에 의한 세인 혹은 대중이라고 할 수 있다. 본디 자신을 상실 혹은 아직 형성하지 못하고 평균선을 조장하는 타인의 영향에 의해 평균적 일상성 속에서 비본래적으로 살아간다.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상실했을 수도 있거나 자식 자신을 아직 획득하지 못했을 수 있음은 오직 그가 그의 본질상 가능한 본디 존재인 한, 다시 말해서 자기 자신을 자기 것으로 하는 한에서만 가능하다. 본래 성과 비 본래 성이라는 두 존재 양상은 현존재가 도대체 각 자성으로 규정되어 있다는 데에 근거하고 있다."
"눈에 띄지 않고 확정할 수 없는 가운데에서 세인은 본디부터 가지고 있던 자신의 독재권을 행사한다. 우리는 세인이 즐기듯이 즐기고 만족스러워한다. 우리는 세인이 보고 판단하는 것처럼 문학과 예술에 관해서 읽고 보도 판단한다. 또한 우리는 세인이 물러서듯이 군중으로부터 물러서기도 한다. 우리는 세인이 격분하는 것을 보고 우리도 격분한다. 세인은 특정한 자가 아니다. 그것은 총체라는 의미에서는 아닐망정 모든 사람이다."
2.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 회복
이러한 세인적 자기는 본래적 실존을 회복해야 한다.
그냥 갑자기 대중과 같은 생각을 지닌 내가 갑자기 나만의 생각을 가지게 될 순 없다.
이 과정에는 불안, 죽음, 죽음에로의 선구, 양심과 선구적 결단이라는 네 가지 단계가 존재한다. 이러한 과정을 겪는 것은 우리 인생에서 우울하고 절망적인 기분을 느낌과 동시에 기대심리와 그에 따른 만족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과정 : 불안
본래적 실존 회복 과정에서 불안의 역할은 무엇일까?
하이데거에 의하면, 불안의 기분에 휩싸인 현존재에 존재자뿐만 아니라 존재자를 사용하는 방식과 타인을 배려하던 친숙한 방식 일체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 무(無)로 전락한다.
이 무는 우리가 습관적이고 관습적으로 살아가던 공공 세계와 주위 세계가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하는 것을 의미한다.
안정적이고 친숙한 일상 세계에서 우리는 마음 편히 살아간다. 그러나 이렇게 세인-자기 혹은 대중으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살다가, 본디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게 될 때 우리는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본래적 자기 자신이 비본래적 실존을 위협하여 불안을 야기하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가 불안해하는 대상은 일상 세계가 붕괴하면서 자신에게 섬뜩하게 드러나는 세계 자체라고 주장한다. 이 세계는 전 포스팅에서 설명한 세계-내-존재로 규정되는 세계이며, 불안의 대상은 세계-내-존재 그 자체로서의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을 향한) 고유한 가능성이다.
이제 자신은 불안이라는 기분에서 개시된, 자신이 구현해야 할 고유한 실존 가능성을 실행하고 책임져야 한다. 기대되지만 심히 불편한 기분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엄습하는 불안은 자신에 대해 행사하던 공공 세계의 지배력과 구속력을 해제시킨다. 그리고 그 세계에서 존재하던 일상인들 또한 무효화시킨다. 이처럼 불안은 일상인 혹은 세인이었던 자신과 그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이해를 무효화시키는 가장 최초의 중대한 사건이다.
"불안은 세계의 도구들과 적재 전체성을 붕괴시킨다."
"불안은 현존재를 개별화시키며 그들을 '유일한 자기'로서 열어 밝힌다. 불안은 현존재를 극단적인 의미에서 그의 세계 바로 앞으로 데려오며 그래서 현존재인 자신을 세계-내-존재로서의 자신 앞으로 데려오는 것이다."
오늘은 인생 터닝포인트가 되는 가장 중요한 시작점이자 우리가 모두 인생에서 언젠가는 겪게 되는 불안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다음 시간에는 불안보다 더욱 극적인 죽음이라는 계기를 통해 인간이 어떻게 각성하게 되는지 알아보겠다.
'철학-세기의 주장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근본불교 - 고타마 싯다르타 (0) | 2022.09.15 |
---|---|
하이데거의 죽음에 관한 해석 (0) | 2022.09.12 |
하이데거의 생애 (0) | 2022.09.07 |
프리드리히 헤겔 : 인륜 단계 (0) | 2022.09.05 |
프리드리히 헤겔의 추상법 (0) | 2022.09.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