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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세기의 주장들

하이데거의 생애

by 작은새추리 2022.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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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을 대표하는 철학자 중 한 명인 하이데거. 
이름이 익숙할 것이다. 그는 실존주의 철학자이기 때문에 그의 사상은 많은 곳에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남다른 철학을 가진 인물로도 유명하다.


1. 생애

하이데거

1889년 9월 26일 그는 독일 최남단에 자리한 시골에서 성당지기의 아버지와 평범한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학업에 곤란을 겪었던 적도 있었으나 신부님의 도움으로 김나지움에 진학할 수 있었다. 김나지움이란 국가별로 조금씩 제도가 다르긴 하지만 대개 유럽의 중고등학교 과정의 교육기관을 의미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김나지움 졸업 후 신부가 되기 위해 수도회에 입단하며 수련하였으나 2주 만에 그만두고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게 된다. 

이처럼 젊은 시절 진로에 대해 극심한 고민을 하고, 좌절을 겪고, 또 이미 내렸던 결정을 번복하는 일은 어디서나 흔한 일이다. 위대한 철학자 하이데거도 이런 시련 끝에 철학을 전공하게 된 것이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군으로 징집되어 서부전선에서 전쟁을 직접 경험하였다. 독일 패전 후 현상학의 대가 에드문트 후설의 조교로 활동하게 된다. 이후 세기의 명저로 꼽히는 '존재와 시간'을 집필하여 후설의 후임으로 자신의 모교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정교수로 임용된다. 나중엔 승승장구하여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에 취임하였다. 한편 그의 스승이자 유대인이었던 에드문트 후설은 이 시기에 나치에게 핍박받아 학술 활동을 할 수 없는 지경에 달했다.

나치가 정권을 차지하고 있던 1933년 5월 1일 하이데거는 나치당에 입당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가지 체제에 전부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 나치가 내세우는 철학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인간을 경제적 생산의 부품으로 전락시키고 결국 본연의 인간성을 말살하는 데에 반해, 나치는 독일의 전통적 민족정신과 자연의 회복을 부르짖었다. 자연의 회복이라는 주제는 자연을 보호하고 동물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 중점을 두는 것이었다. 이러한 자연성과 인간성을 중요시한 철학에 하이데거는 매료되었다. 

또한 유대인들의 철저한 자본주의 정신, 즉 계산적이고 상업적인 정신이 인간성을 타락시켰다고 믿었다. 그가 나치당에 입당한 것은 정치적 압박이 아닌 개인의 신념과 취향을 행동으로 옮긴 자의적 판단에 의한 결정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하이데거 사후 한참 뒤에 출판된 그의 일기를 엮은 '검은 노트'에서 그의 반유태주의 성향 및 나치주의 성향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 출간 후 많은 논란과 충격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나치당원이었던 하이데거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한 후, 모든 자리에서 자의적 혹은 타의인 은퇴를 하게 되며, 이후 별장에서 칩거하며 집필활동에 몰두하였고 그렇게 1976년 심장마비로 타계하였다. 



2. 현존재와 실존


"모든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으로 태어나서 한 사람으로 죽는다."

이제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핵심 사상에 대해 알아보자. 

"현존재란 그 존재하면서 이 존재한 자체가 문제가 되는, 이해하는 존재 가능으로서 존재한다. 그런 식으로 존재하는 존재자는 각자 나 자신이다."

쉽게 말하면 현존재란 나 자신이 존재한다는 그 사실 자체를 가장 큰 문제로 삼고 있는 존재자이다. 자신의 존재에 관해 물음을 던지는 동시에 그러한 물음의 대상이 되는 존재를 현존재라고 하며, 이러한 현존재는 다른 존재자들의 존재를 이해하고 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 
이렇게 현존재가 문제 삼는 자기 자신의 존재 자체가 바로 실존이다. 


그렇다면 실존이라고 하면 되지, 왜 자꾸 현존재라고 하는가?
하이데거는 현존재라는 칭호가 순전히 이 존재자를 지칭하기 위한 순수한 표현으로써 선택했다고 한다. 
처음부터 사실 개념 이해하기가 어렵다. 두 가지의 비슷한 개념 때문이다. 보다 더 간결히 정리해보도록 하자. 
나라는 존재 자체는 실존이며, 이러한 실존을 문제로 삼고, 물음을 던지면서 동시에 그 물음의 대상이 되는 존재가 현존재라고 하겠다. 
지금 '나'를 2개로 분리했기 때문에 어려울 수 있다. 어려우면 그냥 비슷하다 생각하고 일단 넘어가자. 철학이라는 것은 계속 읽다가 보면 초반에 이해 안 되는 것도 나중엔 자연스럽게 이해되기 마련이다.

실존이든 현존재이든 어쨌든 나라는 존재에 계속해서 물음을 던지는 자신!
이러한 현존재는 가장 큰 특징이 있다.

바로 이 세계에서 타인과 교류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세계란 객관적 자연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다른 존재자들과 마주치고 관계하는 존재자들의 연관 관계의 전체이다. 따라서 이 세계는 공통적이면서도 각자 다르게 구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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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보자. 대한민국에는 약 5천만 명이 살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비슷한 DNA, 의식주 및 예술과 관련된 한국의 전통문화를 가정에서 직접적으로 경험하며 성장했고, 저녁에 방송국에서 나오는 뉴스도 동일하므로 동일한 정보들을 공유한다. 
그런데 더 나아가 깊이 들어가 보면 개인이 성장한 배경, 관계 맺는 사람, 소속, 친구, 사랑하는 사람 등등 이 모든 것들에 의해 각자가 경험하는 세계는 공통적인 부분보다 다른 부분들이 수없이 많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지구라는 같은 세계 속에서 살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사람들이 속한 세계는 각기 다르다. 하이데거는 지금 이러한 세계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세계 속에서 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현존재로서 개시성을 갖고 자기와 세계가 하나의 존재자인 현존재에 공 속해있다. 세계와 나는 분리될 수 없다.
(*개시성: 현존재의 존재 자체가 드러나는 장(場) // 개시(開示) : 열어서 보임, 분명하게 나타남)

 

이에 따라 현존재를 세계-내-존재라고 특징짓는다. 


"현존재에서 '현'이라는 표현은 본질적으로 개시성을 의미한다. (중략) 조각조각으로 접합된 성분들로 분해될 수 없다고 해서 이 구성 틀의 구성적인 구조 계기들이 여러 겹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설명을 통해 현존재가 세계와 분리될 수 없다고 해서 각자의 개성 없이 그저 관련된 사람들과 세계가 동일하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

 

다음 시간은 이러한 현존재가 진정한 본디 실존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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