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불교의 핵심이자 정수 이론인 연기설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데 불교에는 십이연기설이라는 이론 또한 존재한다.
연기설이 이 세상의 원리를 제시한 이론이라면 십이연기설은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는 세부적인 심리 과정을 설명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석가모니가 일체의 생멸 변화의 법칙성을 규명한 연기설에 입각하여, 인생의 괴로움의 원인과 그것의 제거를 설명하고 있다.
자, 그럼 인간은 왜 괴로울까?
우선 복잡한 십이연기설에 들어가기 전에 불교의 대표적인 삼법인설을 짚고 넘어가자.
1. 삼법인설(三法印說)
법(法)은 불교에서 진리를 의미한다. 삼법인은 세 가지의 진실한 가르침이란 뜻으로 세상의 모든 현상과 존재의 참다운 모습에 대한 부처의 깨달음을 설명한 것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두 제, 행할 행, 없을 무, 항상 상)
모든 것은 연기설에 입각하여 인연이 화합하여 생성된 일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단 0.00001초도 고정됨 없이 부단히 변화하는 것이 세상의 진리란 뜻이다.
따라서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어떤 존재가 영원히 존재한다거나, 절대 변하지 않는다거나, 어떤 고정된 특성을 지니고 있다거나 하는 등의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며,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이를 좀 더 불교적 용어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자성(自性)을 지닐 수 없다."
이와 관련된 부처의 가르침을 읽어보자.
"마땅히 색(色)은 무상하다고 관찰해야 한다. 바르게 관찰한 사람은 색을 싫어하게 되고, 즐기려는 욕탐도 사라진다. 이러한 사람을 마음이 해탈했다고 한다."
2) 일체개고(一切皆苦; 한 일, 온통 체, 다 개, 고통 고)
일체개고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설하는 것이다. 자 드디어 괴로움이 나왔다. 불교에서 괴로움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우리가 아는 아픔과 쓰라림과 고통을 말하는 걸까? 정확히 알아보자.
괴로움의 원뜻은 '힘이 든다'이다. 이 용어는 즐거움에 반대되는 고통스러운 감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느끼는 괴로움을 비롯한 즐거움과 괴로움도 즐거움도 아닌 중간 상태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즉, '살아있다는 것은 고통이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다는 것은 즐거움, 고통, 그 중간 상태를 모두 포괄하는 '힘이 드는 것이다'라고 해석해야 부처가 설파한 내용에 가장 근접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제행무상에서 보았듯이 색은 무상하다. 이렇게 무상한 색을 자꾸 의식적으로 '행함'을 통해서 노력하는데 괴로움은 이로부터 발생한다.
즉, 항구 불변하지 않는 것을 항구적인 것으로 보아 그것을 유지하려는 결코 이룰 수 없는 노력, 달리 말해서 참되지 않은 것을 진리 혹은 참으로 보고 그것에 집착하려는 노력 그 자체가 괴로움이다.
다시 한번 간단히 정리하면 일체개고는 무상한 것을 무상한 것이 아닌 양 집착하는 데서 괴로움이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3)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두 제, 법 법, 없을 무, 나 아)
이 세상에는 단일하고 독립적이며 자아 존재적이고 자아 결정적인 영원한 존재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불교적으로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제법무아란 이 문장을 완전히 부정한다.
즉, 그런 존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비구들이여, 물질은 무상한 것이며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다. 괴로운 것은 나가 아니며 나가 아닌 것은 또한 나의 것도 아니다. 이 눈은 내가 아니고 나 또한 그의 것이 아니며, 내가 눈을 만든 것도 아니고 그것이 나를 만든 것도 아니다. 그것은 없는 가운데서 생긴 것으로 곧 무너져 없어질 것이다. 그것은 과거에서 온 것도 아니고 현재에서 온 것도 아니고 미래에서 온 것도 아니다. 모두 인연이 모여든 것이다."
제법무아는 나라는 관념이 인간의 사유에 의해 형성된 것일 뿐이라 주장한다. 나에 대한 집착으로 일어나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나, 자아, 실체가 존재한다는 아집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제법무아는 나의 존재뿐만 아니라 '나의 것' 또한 부정한다.
부처는 이처럼 세상에서 유일무이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나와 나의 것에 대한 실재성을 부정하고 그것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요구하고 있다.
해탈한 자는 이러한 자들이다. 이를 열반적정(涅槃寂靜)이란 네 번째 가르침으로 부르고 있다. 열반적정까지 합하면 사법인설이다. 하지만 핵심 원리는 삼법인이다. 삼법인이 원인이 되어 바람직한 결과를 열반적정으로 제시하고 있다.
열반이란 '불어서 끈다'라는 뜻으로서 번뇌의 뜨거운 불길이 꺼진 고요한 상태를 말한다. 요컨대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난 세계가 곧 열반이다. 해탈한 자들은 열반에 들어갈 것이다.
이렇게 삼법인의 핵심 정의에 대해 알아보았다.
지금부턴 십이연기설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도 함께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자 석가모니 또한 문제 삼았던 14가지 질문을 정리해보겠다. 부처는 소위 형이상학적 희론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는데 바로 이 질문을 읽어 보면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십사무기(十四無記)
첫째, 세계는 상(常)인가?
둘째, 세계는 무상인가?
셋째, 세계는 상이며 무상인가?
넷째, 세계는 상도 아니고 무상도 아닌가?
다섯째, 세계는 유한한가?
여섯째, 세계는 무한한가?
일곱째, 세계는 유한이며 무한한가?
여덟째, 세계는 유한도 아니고 무한도 아닌가?
아홉째, 정신과 육체는 하나인가?
열째, 정신과 육체는 둘인가?
열한째, 여래는 사후에 유인가?
열두째, 여래는 사후에 무인가?
열셋째, 여래는 사후에 유이며 무인가?
열넷째, 여래는 사후에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가?
※ 상(常)의 사전적 의미
1. 떳떳하다
2. 항구하다(恒久), 영원하다(永遠)
3. 일정하다(一定)
※ 여래(如來)
여래 십호의 하나. 진리로부터 진리를 따라서 온 사람이라는 뜻으로 ‘부처’를 달리 이르는 말이다. 석가모니가 부처이긴 하나, 부처라는 호칭이 석가모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주의하자.
※여래십호
부처의 공덕을 기리는 열 가지 칭호. 곧, 여래(如來)ㆍ응공(應供)ㆍ정변지(正遍知)ㆍ명행족(明行足)ㆍ선서(善逝)ㆍ세간해(世間解)ㆍ무상사(無上士)ㆍ조어장부(調御丈夫)ㆍ천인사(天人師)ㆍ불세존(佛世尊)이다.
중요한 것은 부처는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 십사무기(十四無記)라고 한다.
왜 부처는 이렇게 중요해 보이면서 도무지 인간은 깊게 생각할수록 머리 아픈 문제에 대해 답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십이연기설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다음 시간은 십이연기설과 중도설에 대해 알아보고 근본불교의 시간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철학-세기의 주장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로이트가 본 인간과 세계 (0) | 2022.09.26 |
---|---|
근본불교 - 고타마 싯다르타 (0) | 2022.09.15 |
하이데거의 죽음에 관한 해석 (0) | 2022.09.12 |
하이데거의 존재론 : 불안 (0) | 2022.09.12 |
하이데거의 생애 (0) | 2022.09.0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