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 내 말을 한 번 믿고 따르는 게 어떻겠소, 나는 거짓은 절대 전하지 않는다네. 이건 이 나라에서, 아니 이 세계 전체에서 가치를 매길 수조차 없는 귀한 것이라네. 물론 내가 온 그곳에서 이건 꽤나 흔한 것이지만, 적어도 선생의 세상에선 그렇지 않다는 걸 확신하네. 조 왕국의 동전, 하나만 있어도 평생을 먹고살 만큼 귀한 것이지만 자네가 물로 베푼 호의를 감안하여 마음 편히 건네겠네. 어때, 이 정도면 저 술을 내게 줄 수 있겠는가?”
처음 들어보는 왕국의 동전, 겉보기에 마땅히 쓸 곳조차 없어 보이는 생경하지만 어느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동전이었다. 하지만 그 사내의 얼굴에서 나오는 간절함을 거절하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하하, 이게 그렇게 대단한 거군요. 사실 뭐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뭐 어쨌든 그만큼 귀하다니, 감사히 받겠습니다.”
나는 동전을 들어 올린 뒤 누가 봐도 어색한 미소를 날렸다. 그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 마른기침을 했다. 이윽고 그가 망토를 내렸는데 이와 관련해 조셉의 묘사가 꽤 정확했다. 흑인을 떠올리게 하지만 동인도제도의 아시아인 얼굴이 전형으로 담겨있는 얼굴과 어딘지 모를 오싹한 기운이 감도는 미지의 것을 품고 있는 눈, 그리고 조금씩 흠집 난 입술.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었다. 망토 속 터빈은 그가 인도 반경에서 온 것을 확신하게 해 주었다.
“맛이 좋군, 이런 건 당신들 돈으로 얼마나 하오?”
“쉽지는 않아요. 동전 한 두 개로는 안 됩니다.”
나는 센트를 튕겨 보였다. 그가 어딘지 겸연쩍은 미소로 이에 응했다. 잠시 생각한 그는 망토 안에 손을 넣어 조 왕국의 동전이라 부르는 그 황동색의 동전을 꺼냈다.
“나한테는 의미가 없는 것이지, 조금 더 줄 수 있겠소?”
흔히 오지 않는 손님이었다. 그와 오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저 정도의 양이라면 한 며칠을 여행을 떠나와도 될 정도였다. 누군가 베푸는 호의를 거절하는 건 아니라며 그가 한 번 더 나에게 그걸 권하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동전을 챙겼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기분이 좋아 즉흥적으로 가게에서도 꽤 고급으로 치는 27년 된 고급 양주를 꺼내 각자의 잔에 따라 마셨다. 상대는 흡족한 듯 미소를 보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 후, 한 시간 가량 이어진 대화 속에서 나는 단 한 번도 정신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생기를 되찾는 느낌이었다. 내생에 이렇게 기분 좋은 술은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을 ‘전달하는 사자’라고 소개했다. 조셉의 처음 설명과는 조금 달랐지만 깨우치게 하는 자라는 것의 맥락과는 어느 정도 상통했다. 자신은 이름 같은 건 없으며, 이 세상 너머의 검은 대지에서 왔다고 한 그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가장 흥미로운 건 어떤 존재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건 분명히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기에 우리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리가 만무한 것이었다. 굳이 지금에 와서 그것을 명명하자면 나는 ‘아말리움’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다. 그것 외에 그 생경하고 불혹한 무한의 어둠에 관해 설명할 방법이 없다. 은연중의 대화 속에 아말리움에 관한 개념을 나의 마음속에 세뇌하듯 그 자가 심은 후로, 나는 내 몸에서 뭔가 이상 반응이 일어남을 느꼈다. 우리들의 즐거운 대화는 내 혀가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말려 들어간 그 순간, 공포의 환영으로 바뀌었다. 나는 그가 망토를 내린 모습을 분명히 보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망토 안, 숨겨졌던 뿔과 늠름한 거근, 붉은색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눈, 그리고 천지가 창조된 시점부터 존재한 듯 보이는 놀라울 정도로 거대하고 오래된 날개! 나는 그의 날개 펄럭임에서 이 우주의 탄생과 소멸을 동시에 보았다. 제 아무리 그것이 미쳐버린 나의 뇌가 본 환영이라 한들 나는 내 뇌에 각인된 아말리움과 그의 예언에 관해서는 결코 그 무엇도 부인할 수가 없다.
“바이스 선생! 이렇게 내 모습을 본 이상, 영겁부터 느껴진 당신의 가까운 미래에 관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겠소! 처음 하얀 눈이 내린 그날, 내가 다시 올 것이오, 당신은 전지전능한 아말리움의 인도자인 나, 부라스테에게 선택되어 인간으로서 느낄 수 없는 우리의 위대한 신 아말리움을 느끼게 될 것이오,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자연현상에 앞서 존재하는 이 무자비한 현실에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말게, 본디 정해진 바에 따른 것일 뿐이니.”
부라스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사라졌다. 하늘로 솟구친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알 방법은 전혀 없었다. 그저 그렇게 사라졌다. 마치 애초에 없었던 듯이. 정신을 잃기 전 나는 그의 날개 짓을 몇 번 본 기억이 아스라이 있지만 그 이상은 무의미한 추측에 불과했다. 그날 후로 내 일상은 완전히 바뀌었고 편집증 환자처럼 골방에 들어박혀 양조장을 매각하고 남은 돈으로 살아가는 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유명한 정신과 의사에게도 찾아가 보고 영험한 샤먼에게도 가보았지만 모두 무의미했다. 내 머릿속에 존재하는 그날의 선명하고 굴욕적인 일을 입 밖으로 꺼내기 위해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무지 어떤 행위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것과 관련한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연법칙이 나를 꾸짖듯 말문이 턱 막히고 호흡이 가빠지는 이상 현상을 열 번 넘게 겪고 나서야 나는 그것을 잊는다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행위임을 깨달았다.
그러던 어느 날, 즉 오늘, 나는 입이 열렸다. 굳어 있던 내 손도 풀려 자유로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그 끔찍한 ‘아말리움’에 관해서도 글을 쓰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이렇게 나의 유작이 될 수 있는 글을 남기는 것이다. 어디서 불어왔는지 모를 바람이 초를 덮쳤고 이내 방은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며칠 만에 골방에 나있는 창으로 밖을 보니 반사된 유리에 면도를 하지 않아 털이 덥수룩한 내 얼굴이 비친다. 그리고 마치 먼지처럼 내리는 하얀 눈이 보였다. 첫눈이다. 그 끔찍한 예언이 내게 다시 찾아와 나의 정신을 지배하려 하는 그때, 나는 멀리 항구에서부터 시작된 엄청난 연기 사이로 무엇인가를 볼 수 있었다. 아아, 저건! 설명조차 불가한 그 태곳적의 원시적 날개를 의기양양하게 등에 피운 채 끔찍한 뿔을 내밀며 날아오는 저건 분명히 부라스테, 그 자였다. 아말리움의 인도자 부라스테가 그 스스로의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이다! 이제 나는 아말리움의 공포를 몸소 느껴야만 하는 것이다.
written by J.H 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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